휴일이고 해서, 인영님과 약속한대로 외출을 나섰다.
주 목적은 전시에 다녀오는 것이었는데, 두 전시를 연달아 보는 꽤 빡빡한 스케쥴이었다.
워낙 오랜만에 전시장을 찾는 것이어서 좋은 기분으로 출발했다.

생각보다 더운 날씨에, 차간 시간이 길어 빽빽하던 버스를 두번 갈아타고 도착한 곳은, 척추를 본따 지었다는 일설의 동아일보 사옥 옆, 일민 미술관.
(그 사유가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동아일보가 과연 한국의 투명한 신세기 척추가 되어줄지는 회의스러운 바이다.)

최정화씨의 개인전이라고 해야 할지, 그가 선택한 그럴듯한 잡동사니들의 무대라 해야할지.
아무튼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이라는 전시가 첫번째.


보다시피, 연출이라는 명목으로 작가의 이름이 올라있다.
연출이라는 표현은 응당한데, 이 무대에는 최정화 본인의 작품들 외에도 여러 작가들의 작업들이 함께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이 이미지는 일민 미술관 홈페이지 측에서 제공하는 이미지이다. 맘에드는 이미지는 따로 있었지만, 찾기 귀찮아서 패스.)

이래도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최정화씨가 취미삼아 취합한 이거리저거리 이사람저사람의 잡동사니들이 때로는 가격표까지 달고 주욱 늘어서 있는, 시장통 가판 같은 전시이다.
따라서 박물관 까지는 이해하겠지만, 믿거나 말거나 라는 단서는 왜 붙었는지 모르겠다. 그 역시 재미일 뿐인 것일지도.

그중에  재미있는 상품들을 몇개 건졌는데, 첫번째는 '노네임 노숍www.nonamenoshop.com' 이라는 디자이너 그룹의 전시물들.
첫번에 '이거 재밌다!' 란 생각이 들었고, 촘촘하고 작은 도안을 들여다 보고 있자니, 새록새록 더 재밌었다.
뜬금없이 수지침 인체 도안 같은 걸 늘어놓고 대소음양 체질과 씨앗모종들간의 관계를 다이어그램으로 만들어 맞춤형 정원 디자인을 해놓질 않나,
달력, 시간, 컨디션, 계획, 감정 등을 엮어 휴대용 라디오키트 같은 걸 만들어 놓질 않나.
젤로 재밌었던 건, 작업 공간 부족한 예술형 실직자들(작가들)을 위해 정해진 공간을 때로는 전시장으로, 때로는 작업실로, 때로는 카페나 워크숍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든 공간 및 가구 디자인 설계서 였다.
사실 가구라기 보다는 직사각형 프레임에 박스 몇개 수납한 모듈을 다용도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인데,
이 모든 걸 깔끔하게 도안화한 매뉴얼 키트로 만들어 놓은 것.
골 때리는 건, 소비자(?)의 공간을 매뉴얼에 따라 계획해 볼 수 있는 모눈종이 도안도 있다는 점이다.
가능하다면 그 자리에서 하나 사고 싶은 생활키트 였다.
그간 작업 공간, 전시 공간 없어서 쩔쩔매던 선후배 친구 여러분이 떠올라서 고소가 절로 지어지는 시점이었다. 물론 거기엔 나도 포함.
디자이너로서의 치밀함과, 필요에서 나온 것의 절실함과 여유있는 시각에서 비롯한 유머까지 내맘대로 느껴버린 좋은 작업이었다.
(위의 묘사들로는 작품들의 이미지가 그려지지 않을 것 같으니, 링크 걸어둔 홈페이지 방문을 강권한다. 홈피 자체의 구성도 재미있다.)
괜히 한마디 덧 붙이자면, Royksopp의 <Remind Me> 뮤비가 떠오르기도.

두번째는 이주은 김보민 두사람 그룹'소년'의 작업.(위의 전시포스터도 이 그룹의 작업 이미지, 이른바 '상가로봇'이다.)
한쪽 벽면 빼곡히 장난감 상자같은 것들이 들어찬 선반이 있다.
상자에는 친구1호, 친구2호, 친구3호, 임대로봇 등등의 제목과 함께,
웬지 친구 삼기엔 애처로워 보여서, 선물했다간 애 맘에 쓸쓸한 트라우마 남길 것만 같은 로봇들이 쭈그리고 있다.
표정들이 웬지 웃기기도 하고 비뚤어진 것 같기도 해서 맘에 무척 들었다.
물론 적당히 파퓰러하고 이쁘긴 하지만 난 그런 거 좋아하니깐.
나오면서 인영님이 전시도록 산다고 들른 쌈지 샵에 소년 티셔츠가 있길래 하나 샀다. 작아서 난 못입을 것 같긴 한데, 팔던지 누구 주든지. 아무튼 상술 좋아. 힛.


일민 미술관을 나서자 배가 고팠다.
시간이 쪼끔 후달려서 가던 길에 음식점 몇개 봐두고
보세 옷 집 같은 구석, 온통 오렌지 색 조그만 전시공간 Brain Factory www.brainfactory.org 에서 두번째 전시,
문지하 www.jihamoon.com <유쾌한 연옥> 전.



Cautiouscape/경계풍경, 2006, 51x41cm, 한지 바른 캔버스에 잉크와 아크릴


강렬한 오렌지 색 벽에 압도당하지 않을 만한 강한 색의 작품들.
첨엔 애꿎게 서양입맛에 맞는 동양적 코드에 전국민 애용코드 몽환적 분위기 첨가물인가 싶어서 거부감이 확 들었었는데, 보다보니 그런 인상은 사라졌다.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마련된 텍스트에도 있듯, 우연/디테일, 무질서(chaos)/질서(cosmos), 진지함/해학 등의 상반된 것들을 조화(harmony)하려 한다는 의도는 추가 설명 없이도 약간은 이해되었고.
단지 내가 맘에 든 점은 작품들이 의외로 웃기고 야하다는 사실이었다.

호랑이가 저고리 물어가는 모습이 얼기설기 이상하게 휘몰아치는 장면의 제목이 <처녀 보쌈>.
웅장한 산에 노랑색 길이 나있는 앞쪽으로 복숭아들이 애드벌룬 처럼 끈에 묶여 떠있는 <행운의 딸을 가질 꿈>.
쌔빨갛게 달뜬 열매들이 달린 바닥에 난 풀들, 제목은 <처녀풀>.
(상기 링크의 브레인 팩토리 홈피에 가면 이미지들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무언가가 웃기려면, 그리고 야하게 보이려면, 반드시 진지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총천연색으로 야하게 입고 나온 여자남자가 우스꽝스러울려면 그 여자남자는 옷을 고르고 화장을 하고 향수를 고를때 나름 진지해야 한다.
심장이 허덕거릴 정도로 섹시하려면 죄의식이 동반되어야 한다. 죄 지을때 만큼 진지한 때가 또 있을까.
광대가 스스로 우습다는 걸 자각하면 사람들은 웃지 않는다.

작품들 앞에서 실실쪼개고 섰으려니까, 전시장을 지키던 여자분이 힐끗힐끗 쳐다봐서 혹시 작가본인이 아닐까 했는데, 그렇진 않았다.


두번째 전시장을 나서며 좀전에 봐둔 상당히 허름한 메밀전문 음식점에서 요기를 했는데, 무척 맛있었다.
허름해서 믿고 들어갔는데, 대충 예감이 맞은 것이다.
특히 메밀전.
가상이부분의 바삭함과 넓적한 부분, 메밀가루 특유의 쫄깃함이 이와 혀사이로 착착 감겼다.
무채를 면과 자연스럽게 곁들여 사각사각 씹히는 냉면도 전 못지 않게 맛있었고.
나중에 막걸리 한잔하러 다시 들를테니 생각있으신 분은 참여하시길...

그런데 여기서 복병이 있었으니,
주문하고 얼마되지 않아 갑자기 가수 양희은씨가 들어와 옆테이블에 앉는게 아닌가;;.
이거야 말로 오늘의 믿거나 말거나.


아무튼 이래저래 재밌는 전시보고 담백한 것도 먹고 양희은씨도 만난데다가, 지금은 뜨듯하게 방 안에서 포스팅 하고 있으니,
개천절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다.




* 마지막으로 광화문역 앞 사당주위에 늘어선 웃기는 석상들 몇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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